외환 사회 무역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7월 13일 | 0개 댓글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김주만 기자

고물가·무역적자에 '빨간불'… 정부, 비상경제장관회의 소집

6월 물가상승률 6% 돌파 눈앞에 상반기 무역적자 103조 달해 에너지원 수입 늘고 수출 감소 탓

여기는 칸라이언즈

시장경제 포럼

66년 만에 최악의 무역적자에 정부가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소집했다. 물가 상승률이 6%를 넘보는 상황에 상반기 무역수지가 103억달러 적자를 기록하자 금융·외환위기에 준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앞서 '6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올해 1~6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5.6% 증가한 3503억달러, 수입은 26.2% 늘어난 3606억달러로 집계됐다. 수출은 비교적 선방했지만 수입이 더 큰 폭으로 늘면서 상반기 무역적자가 103억달러에 달했다. 무역적자 확대의 중심에는 급등한 에너지와 원자재값이 자리잡고 있다. 상반기 원유, 천연가스, 석탄 등 3대 에너지원 수입은 1년 전보다 87%나 급증했다.

여기에 수출둔화까지 겹치면서 무역적자 폭을 키웠다. 지금껏 수출이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으나 지난달 수출은 5.4% 증가에 머물렀다. 화물연대 파업에 따른 운송거부로 기업 생산이 차질을 빚은 데다 미국 등 주요국의 긴축에 나서면서 경기 침체 우려도 높아졌다.

물가 상황도 녹록치 못하다. 오는 5일로 예정된 6월 소비자물가는 6%대를 넘보고 있다. 앞서 5월(5.4%) 수준을 뛰어넘을 경우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11월 (6.8%) 이후 23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이 경우 물가안정을 통화정책의 중심에 둔 한국은행이 한 번에 기준금리를 0.50%p 높이는 빅스텝 가능성도 커져 경기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email protected]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 newdaily.co.kr]
Copyrights ⓒ 2005 뉴데일리뉴스 -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방금 보신 기사와 같이 읽으면 좋아요!

1 韓美 '빅스텝' 물가잡는다지만…경기침체 우려에 고용 걱정↑연준, '매파' 목소리 커…7월도 '자이언트 스텝' 가능성

2 [국가재정전략회의]"국가채무 50%중반 관리"…文정부 60%보다 낮춰관리재정수지 '-3.0%이내'로…재정준칙 법제화

3 1분기만 50兆… 기업들, 금융기관 차입 2배로 늘었다운전자금 수요 확대로 차입 늘어

4 尹정부, 나랏빚 1000조 재정다이어트 돌입…공공기관 '숨은빚'부터 턴다올해 공공기관 40곳 부채 585兆…올해 본예산과 맞먹어

5 "글로벌증시 뚝뚝-유가도 급락"…조여오는 'R(경기침체)의 공포'美채권시장… 2년물·10년물 금리 역전, 올들어 3번째

6 물가 6% '스태그' 공포 확산…글로벌경기 직격탄 3분기 역성장 우려까지6월 소비자물가 급등…외환위기 이후 24년여만에 최고

7 물가 6%도 뚫렸다… 0.5% '빅스텝' 초읽기6월 6.0%… 외환위기 수준

8 5월까지 국세 35兆 더 걷혀… 경기회복·기업실적 덕분국세수입 196.6조… 세수진도율 49.6%, 전년비 2.5%p↑

외환 사회 무역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국사회는 외자 유치와 국내 자본시장의 글로벌 개방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97년 위기에서부터 현재 새로운 위기를 누적해가기까지, 한국의 경제구조와 제도 각 부문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제도적 변화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장진호 선생님과 함께 돌아봅니다.

해외자본투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사건 (사진: 경향신문)

1997년이 이미 20년 이상 지나간 시기이지만, 그 해의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한국 경제와 사회의 변화는 현재 한국인들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실은 1997년 말의 그 위기 직전 거의 한해 내내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국에서는 “경제”를 중병과 위험에 빠진 어떤 인물로 의인화하여 “우리 경제를 살려내라”는 식의 다소 희극화된 연속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뉴스에서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의 단어가 점차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후보는 선거 유세기간 중 연말의 위기가 명백해지기 전까지 ‘세계 7대 경제강국’의 비전을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역설하기도 했다. 이 비전이 가능하기까지, 또 위기에 이르기까지 해방 후 국내 상황의 전사(前史)는 다음과 같다.

국내 경제와 산업구조는 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드라이브를 본격화한 이래, 1970년대 베트남전과 미군철수 등 안보위기와 맞물려 중화학공업화로 급속히 전환하였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1980년대 중반 4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경험하여 ‘외채망국론’의 망령을 떨쳐내었고, 이 와중에 1986년 아시아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였다. 1980년대에 자주 개최된 서울국제무역박람회는 거대 중화학 분야 수출대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들의 위용을 내외로 과시하여 1993년에는 개발도상국 최초로 대전에서 엑스포 즉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적극적 산업정책과 효과적인 관료들의 리더십, 재벌창업자들의 개척자적 자본가정신이 자주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농촌을 떠나 도시공장에 취업한 노동자와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감내한 ‘근검 자본주의’의 결과이기도 했다.(Amsden, 1989; Wade, 1990; Song, 1990; Evans, 1995; 구해근, 2002)

이와 같은 1980년대까지의 경제산업 구조의 전환과 재벌의 성장에 더해, 1987년 외환 사회 무역 민주화 이행과 노동자 대투쟁, 서울올림픽을 배경으로 ‘소비 자본주의’가 국내에서 꽃피기 시작하였다. 1960-70년대 정부가 국민들에게 적극 독려하던 저축은 더이상 미덕만은 아니게 되었다. 컬러TV와 프로야구의 시대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1985년 울산의 현대백화점은 본점을 서울 압구정으로 이전하였고, 1989년 롯데쇼핑은 롯데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1년 신세계백화점은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소비주의적 강남 압구정의 오렌지족, X세대에 대한 담론이 부상하였고, 가수 이 데뷔하며 가요계를 댄스와 힙합이 결합된 아이돌 무대로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발전주의적 근대화/산업화가 무르익어 한국 자본주의가 소비 자본주의 혹은 중산층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하기 시작한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의 시기는, 동시에 국내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와 중첩되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의 개헌을 얻어낸 민주화의 열기와 같은 해 여름 노동자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분출, 그리고 전대협 등으로 조직화된 전국적이고 변혁지향적 학생운동의 분출은 단지 신군부 정권의 타도로 상징되는 정치사회의 민주화 이상을 요구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의 외환 사회 무역 등장과 5.18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급진화된 학생운동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혁명 노선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이 와중에 전대협의 주류는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을 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980년대는 이 시기를 ‘혁명의 시대’로 개념화하는 회고가 이후에 나올 정도로 혁명적 열정과 활동이 학생운동과 각종 ‘민중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 전반에 확산되어 결과적으로 신군부 통치에 균열을 내고 민주화 이행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수 사회운동세력의 정치경제적 대안으로 간주되던 동구권과 소련의 사회주의는 바로 그 시기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 초까지 몰락하였고, 국내에서 정치사회 개혁과 민주화, 그리고 노동자의 세력화를 위한 움직임은 과거보다는 세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적으로 혹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며 1997년까지 계속되었다. 1994년 민중적 시민사회 운동을 표방한 참여연대가 발족하였고,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였으며, 1996년 성탄절 다음날 새벽 보수여당의 날치기 노동법 통과에 대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적 호응을 얻으며 정국을 뒤집기도 하였다. 총파업을 경험하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정당 결성을 결의하게 되고 그해 10월 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을 후보로 내세운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이 결성된다(이후 민주노동당으로 발전).

[보고서] 96-97년 민주노총 총파업 현황

[보고서] 96-97년 민주노총 총파업 현황

96-97총파업투쟁속보1호

다른 한편, 1987년 대통령 직선제는 실시되었으나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에서 신군부가 만든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다른 정당과의 연합을 시도하였고, 제1야당이 된 김대중계의 평민당에 뒤처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김종필의 공화당과 함께 1990년의 3당합당 보수대연합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후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후보로 선거에 승리하였고 1993년 등장한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하나회’등의 정치군인 해체로 인기를 높이더니, '신경제'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며 경제자유화를 추진하였다.

국내에서 1994년부터 정권의 구호로 사용된 ‘세계화’는 박정희 시기의 포괄적 개발주의의 약화된 버전인 1980년대 제한적 개발주의를 더욱 약화시키는 동시에, 1980년대부터 김재익으로 상징되는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구호이기도 했다.(Kim, 1997; 신장섭•장하준, 2004) 발전주의 시기를 상징하던 경제부처인 경제기획원은 1994년 재무부와 통합되며 거대 재정경제원이 되어 사라졌다. 이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간 상호 경쟁 속에서 존재해온 정책결정의 엄격성 효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려지기도 한다(이와 반대로, 199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화의 흐름에서 추진된 한국은행 독립성 강화는 재경원과의 정보 비공유로 외환위기에 일조한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 역시 1982년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으로 바뀌어 지속되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 폐지되고 ‘신경제 5개년계획’이 등장한다. 발전지향적 목표를 갖는 국가의 장기연속적인 정책 목표 설정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경쟁규제적 산업정책이 사라진 상황에서 세계화와 규제완화를 핑계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입도 이 시기에 허가되었다. 철강산업 등 중복투자의 문제도 심화되었다. 이후 외환위기의 단초가 되는 대외채무의 폭발을 불러온 창구가 된 종금사 난립 허용도 이러한 잘못 설계된 규제완화의 결과였다.

또한 대우재벌 총수 김우중(1989)의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에서 보이듯 재벌의 해외직접투자 등 세계진출 및 규제완화 요구와, 1990년대 초부터 국내 금융시장 개방을 위한 미국측의 의도를 반영하여 매년 열린 한미금융정책협의회 등의 맥락에서 이러한 개발주의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선진국클럽으로 홍보된 OECD에의 한국가입을 국내 금융시장 개방 가속화 수용과 맞교환하고자 했고, 한국정부는 이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금융규제 완화, 시장개방 등 개발주의의 전환이 적절한 금융감독 체계 마련 등 국내의 대비가 미흡하고 전체적 상황의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떠밀리듯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는 1989년 말 등 외신의 당시 한국경제에 대한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조롱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1990년대 초중반까지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서, 중반 이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급작스런 우려로의 전환, 그리고 1997년의 위기와 파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외환 사회 무역

기자이미지

김주만 기자

2월 무역수지, 25억 달러 흑자 예상‥환율 압력은 지속

이번 달 무역수지가 모처럼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그러나 치솟는 원-달러 환율 때문에 외환 당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난달 20일까지 무역수지가
9억 3천만 달러 흑자로 나타났습니다.

세계 경제 침체 속에서도
수출이 177억 9천만 달러,
작년에 비해 0.4% 늘었고
수입은 23% 줄었습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유지될 경우
이달 무역수지가 25억 달러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INT▶ 이동근 실장/지식경제부 무역정책실
"선박류 수출이 늘었고 환율의 영향이 컸다.
대만, 일본 같은 경쟁국들의 수출이
45%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치다."

정부가 이례적으로
20일까지 실적을 직접 발표한 것은
불안한 외환시장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을 고비로
안정을 되찾는 듯했던 환율은
동유럽발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다시 달러당 1500원을 넘어섰고,
최근 9일 동안에는 무려 125원이 급등했습니다.

외환당국은 "외환보유액이
2천억 달러 아래로 내려올 수 있다"고 밝혀
외환보유액을 헐어서라도
환율 안정에 나서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2차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 압력을 막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INT▶ 전승지 주임/삼성선물 리서치센터
"3,4월 외국인의 배당 역송금이라는
이벤트성 수급이 있고, 조선사 수주계약의
취소 가능성도 있어 압력은 외환 사회 무역 상당한 상황. "

환율 안정에 당장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무역수지 흑자는
시장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전용 메뉴 호출

기록물 상세검색검색가이드

기록물 원문검색

원문이미지를 제공하는 기록물들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원문이미지를 제공하는 기록물들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토지기록물

일제강점기부터 정부수립 직후까지 생산된 토지 임야대장, 지적ㆍ임야원도 등 지적 기록물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정부에서 발행한 관보를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국무회의록

국무회의록, 차관회의록, 안건철 등 국무회의 기록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외환 사회 무역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정부간행물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간행물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독립운동 판결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관련된 판결문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외환 사회 무역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일제강점기 피해자명부

3.1운동 피살자,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외환 사회 무역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일제강점기 건축도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학교, 형무소, 병원, 지방청사 등의 설계원도를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일제강점기 기록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생산된 기록물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검색을 하고 싶을 때 :
    “ ^ ” (Shift+6)를 사용 하세요.
  •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좀 더 폭넓게 검색하고 싶을 때 :
    스페이스바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를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로 시작하는 단어가 포함된 문서를 검색하고 싶을 때 :
    * ” (Shift+8)를 외환 사회 무역 사용 하세요.
  • 특정단어를 제외하고 검색하고 싶을 때 :
    “ | ”를 사용 하세요.
분야별 주제 및 주요내용 및 소개 테이블
주제유형 정책/제도
하위주제 무역관리제도 무역구제제도 무역금융제도 무역인프라 확충정책 무역진흥사업 무역진흥정책 무역진흥조직 수입정책 수출입통관 제도 수출정책 시기별 무역정책 중소기업 수출지원제도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대외무역법」(1987년 제정)
「관세법」(1949년 제정)
「외국환관리법」(1963년 제정)
「무역거래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2000년 제정)

무역정책이란 한 나라의 정부가 자국의 특정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수출·입 등의 대외적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무역이었다. 경제성장 초창기에 국내 경제기반이 취약했으므로 자유무역과 시장의 원리만으로는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고 정부 주도의 정책에 의해서 경쟁력을확보해야만했다.우리나라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국가들이 무역정책을 통해서 갑작스러운 무역환경의 변화로부터자국산업을 어느정도 보호하거나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점진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945년 해방후 1999년까지 우리나라의 무역은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급성장의 연속과정이었고 이러한 무역의 급성장이야말로 우리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이른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다. 이 기간 우리나라의 무역과 경제성장은 자유방임에 의한 시장원리가 아니라 정부주도로 이루어진 즉 정부의 정책으로 유도된 성장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1940년대와 1950년대는 무역에 외환 사회 무역 대한 강력한 통제위주의 정책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적극적인 수출지원 정책이, 그리고 1980년대 이후는 시장경제 원리가 중시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해 왔다. 특히 IMF의 관리 등이 이어진 1990년대는 인위적 수출촉진 또는 수입억제를 의도하는 종전의 수출지향적 정책이 거의 외환 사회 무역 제거되어 세계시장에서의 시장경제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체제로 변화되었다.

1. 1960년대
1960년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과 함께 수출제일주의의 슬로건아래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강력히 실시되었다. 무역정책도 수출확대를 위한 기반조성으로 전화되었다. 미국의 무상원조가 중단된 상황에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자본재와 원자재의 도입에 소요되는 외환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출의 지속적인 증가가 무엇보다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무역정책의 방향전환을 위한 최초의 주요조치는 1961년 2차례에 걸친 공정환율의 인상이다. 첫 번째 인상은 1961년 1월 공정환율을 1불당 65원에서 100원으로 인상하였고, 이어서 2월에는 다시 130원으로 인상하였다. 이와같은 의도적인 환율의 인상은 ‘공정환율’이라는 고정환율 제도하에서 가능한 것으로, 수입억제와 수출촉진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조치이다. 1961년 5월에 집권한 군사정부는 수출확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수출장려보조금제를 확대하고 수출금융우대제도를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수출드라이브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에는 「수출 진흥법」을 제정하고, 1963년에는 수출소득 외환을 제한품목 수입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수출입 링크제도를 실시하였다. 1964년에는 그때까지 고정환율제를 단일변동환율제로 바꾸면서 1불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인상하였다. 이러한 평가절하로 수출에 대한 가격유인이 크게 확대되었는데 환율에 대한 이러한 조치와 함께 수출에 대한 직접보조는 축소시키는한편 금융, 관세 등을 통한 간접지원은 링크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한편, 1964년부터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여 수출진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도 수시로 외환 사회 무역 개최하여 범국민적인 수출분위기의 조성에 주력하였다.

1967년 1월에는 기존의 「무역법」,「수출진흥법」,「수출장려보조금 교부에 대한 특별법」을 통합하여 「무역거래법」을 제정하였다. 1967년 4월에는 GATT에 가입하고 케네디라운드에 참여했고, 7월에는 수출입 관리를 허용품목 등재방식(Positive List System)에서 불허용품 등재방식(Negative List System)으로 전환하여 수출입기별공고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는 보다 적극적인 국제시장에의 참여, 즉 수입자유화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입자유화의 진전과 함께 그에 따른 부작용 방지를 목적으로 1967년 12월에는 「관세법」을 개정하여 관세율을 전면 개편하고, 긴급·할당·상계·편익관세 등 탄력관세제도를 도입하였다.

2. 1970년대
이 시기 무역정책의 특색은 수출제일주의 정책의 지속과 수출진흥체제의 다양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도입된 각종 수출지원제도를 계속 활용하는 외에 양적인 수출확대 위주 정책에서 질적인 수출진흥 확대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즉 수출진흥에 역점을 두고 수출산업시설의 현대화와 양산체제의 확립, 외화가동률의 제고, 수출절차 및 제도의 간소화 등을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수출지원제도 면에서의 변화를 보면 환율이 1971년 6월 불당 326원에서 370원으로, 1974년 12월에는 다시 480원으로 인상되었다. 1970년대 후반기에는 환율조정이 없었지만 이 시기 미 달러화가 약세를 보임에 따라 원화의 실효환율이 인상되는 결과를 가져와 역시 수출가격경쟁력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금융면에서는 수출산업의 기반확대를 위해 수출산업설비금융이 실시되었다.또한단기 수출금융에서도 불당 융자율의 상향과 수출금리에 대한 차별적 혜택을 부여하였고 중장기 연불 수출금융과 수출보험제도도 실시되었다. 세제상으로는 1973년 종래 실시해 온 외화획득사업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한 법인세와 개인사업 소득세의 50% 감면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수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해외시장개척준비금, 수출손실준비금, 해외투자손실준비금 등의 손비처리 허용과 사전면세제도를 대체하여 수출입에 대한 특별감가상각제도를 도입하였다.또한 수출업자에 대한 영업세를 포함한 소비세면세제도도 1977년 부가가치세의 도입으로 영세율 제도로 대체되었다. 이 밖에 수출다변화를 위해 대한무역진흥공사의 해외조직망을 확충하고 한국수출진흥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3. 1980년대
1980년대는 국제화 지향기로 특징 지워진다. 우리나라 경제의 국제화과정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1970년대 말까지는 수출확대를 통한 성장전략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이르러 정부주도형 경제정책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인플레이션과 산업체질 취약화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팽배하게 되어 안정·자율·개방의 기조 하에 대외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되었다. 개방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 과정이 있었으나 1978년 수입자유화를 실질적으로 확대한 후 1984년부터는 수입자유화 계획 예시제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통상마찰을 줄이고 대내적으로는 관련기업으로 하여금 개방에 대응한 능력을 미리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1986년부터 국제수지가 흑자를 보이면서 수입자유화는 더욱 급속하게 추진되었는데, 대외무역법령도 1986년 종전의 「무역거래법」,「수출산업설비촉진법」,「수출조합법」을 통합하여 「대외무역법」으로 제정하였다. 1980년대 무역정책의 특징은 그동안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기 전반을 통해 추진되었던 수출지원 위주의 정책에서 점차 수입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는 점이다.이러한 인식이 무역자유화와 기업 자율의 존중이라는 시장경제원칙 중시의 정책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4. 1990년대
1990년대 무역정책은 개방·자율이라는 '80년대의 기본적인 정책기조를 유지하였다. 특히 1995년에 WTO의 출범과 1996년 OECD가입, 그리고 1997년말 IMF관리체제 돌입이라는 세 가지 사건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러한 정책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세 가지 주요 사건이 무역정책에 미친 영향은 1960년대 이래 우리나라가 시행해 온 것으로 1980년대까지 정리되지 아니한 직·간접적인 수출지원과 수입제한적 요소의 철폐로 요약될 수 있다. WTO체제의 출범과 함께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제무역규범에 배치되는 각종 규정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대일 수입역조를 완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1978년부터 활용되어온 수입선다변화제도도 1997년 IMF와의 자금지원 협상과정에서 일본측 요구를 수용하여 1999년 6월부로 폐지하였다.


한편, 1986년 제정된 「대외무역법」은 1996년 말 전면 개정되었다. 개정된 주요 내용은 주로 자유로운 무역의 보장과 관련한 것이다.즉 1999년 말 이후부터 무역업자에 대한 관리를 등록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하도록 하여 사실상 무역업에 관한 관리를 종력하였고, 수출입 품목에 대한 관리도 수출입공고에 의하여별도 고시된 소수품목을 제외하고는 수출입승인 없이도 자유로운 수출입이 가능토록 조치하였다.

5. 2000년대
2000년대 무역정책은 무역의 효율화와 무역기반조성으로 압축된다. 경제인프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무역전시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과 무역업무의 효율화를 위해 무역절차를 자동화시키는 전자무역 촉진정책, 무역발전에 따른 인력수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전문무역인력 양성정책 등이 있다.

[MT시평]통화스와프 카드, 미국 받을까

이종우 경제 평론가

이종우 경제 평론가

원/달러 환율이 1320원을 넘었다. 상반기에만 103억달러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한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환 사회 무역 자연스럽게 외환보유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382억달러다. 2021년 9월 4692억달러를 최고로 9개월 동안 7% 가까이 줄었다.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감소세다. 우리나라만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게 아니다. 2019년보다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나라가 많다. 홍콩, 프랑스, 스위스의 외환보유액이 6~7% 줄었고, 뉴질랜드는 절반이 됐다.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것은 무역적자로 달러공급이 감소한 상태에서 석유수입 등으로 많은 돈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기간이 많지 않았는데 올 상반기에 적자가 집중되면서 외환사정이 나빠졌다. 원화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시장에 푼 것도 외환보유액이 감소한 원인이다. 1분기에만 환율방어를 위해 83억달러를 사용했다. 기술적인 요인도 있었다. 외환보유액에는 달러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통화도 많이 있는데 달러강세로 주요국 통화들이 모두 약세가 되면서 달러로 환산한 금액이 줄었다.

적정 외환보유액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정해진 기준이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수출액, 시중통화량, 유동외채, 외국인 증권 및 기타 투자금 잔액 등을 감안해 적정 외환보유액 평가지수를 만들었다. IMF는 이 비율이 1~1.5 사이에 있으면 적당하다고 얘기하는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해당 비율은 0.99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 하락하지만 적정 수준을 벗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경상지급액, 유동외채 등으로 적정 외환보유액을 산정하는데 IMF보다 기준이 엄격하다.

그동안 외환사정과 관련해 긍정적인 변화가 많이 있었다. 올해 1분기 우리나라의 대외채무 중 단기외채 비율은 26.7%다. 금융위기 당시 40%대보다 낮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비율은 38.2%로 2008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단기외채가 경제를 압박한 이전 위기상황과 다른 형태다. 대외순자산도 6000억달러 이상으로 늘었다. 2014년 이전에는 대외부채가 대외자산보다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해외자산의 운용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우리 돈이 국내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원화급등과 외환보유액 감소가 부담이 됐는지 여당이 미국과 통화스와프 체결을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때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양국이 협력하기로 했으니 후속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통화스와프가 재개될지는 미지수다. 금융위기와 코로나19 발생 직후 한미 통화스와프가 체결된 것은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달러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세계 경제위축이 미국으로 역수입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통화스와프가 논의된다면 그건 우리가 필요해서다. 긴축을 진행하는 미국이 통화스와프를 통해 해외에 달러화를 공급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0 개 댓글

답장을 남겨주세요